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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 뱃길 따라 영남대로 옛길따라 (두물머리~문경새재)

forget-me-not 2010. 7. 9. 12:30

남한강 뱃길 배경

 

남한강은 동강이 나서 뱃길은 막혀 버렸고 영남대로 옛길은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처럼 흐릿해졌다. 육로보다는 수로가 원활하여 상경과 하향의 고속도로였던 남한강 뱃길 여행은 불가능하지만, 옛 나루터들의 꼭짓점을 어렵사리 찍어 답사해볼 수는 있다.

 

 

동호와 두모포

 

두모포는 중랑천과 한강 본류의 두 물줄기가 만나는 합수머리에 생겨난 포구라 하여 '두못개(두물개)'라 부르던 데에서 나온 지명이다. 이 포구의 상류쪽에 뚝섬이 있고 하류 쪽에 저자도(닦섬)가 가려주어 호반의 정취를 자아내고 경치도 좋아 시인묵객들은 '동호'라고 불러 선유를 즐기고 음풍명월 시편들을 제가끔 서둘러 내놓기도 했다.

 

두모포 일대는 강북-강남 모두 격조 높은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한강진 방면에는 남산에서 뻗어온 응봉산 중턱에 '독서당'이 있었고 맞은편 쪽으로는 세조 시대의 세력가 한명회가 세운 '압구정'이 마주 보고 있었다. 동호 독서당은 세종 시대에 궁궐 안에 두었던 '집현전'이 연산군 시대에 없어진 것을 그 이후에 다시 부활시킨 것이었다. 궁궐 대신에 경치 좋은 한강변에 설치하고 명칭도 바꾸었다. 벼슬아치들에게 학문연마의 피드백 기회를 주기 위하여 임금의 특별휴가 은전으로 '사가독서'를 시키던 곳이었다.

 

오늘에 동호대교는 있고 '독서당길'은 있지만 옛 자취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옛 두모포 포구였고 근대에는 경마장으로 활용되던 곳마저도 '서울숲'이라는 고급아파트촌이 되고만 있을 뿐이다. 그렇기는 하더라도 고층 빌딩 숲을 이루어 온갖 조명으로 '불야성'의 불빛을 빨아들이고 반사하는 서울의 한강에서 활기와 번영을 살피는 외국인들도 많다.

 

전통시대에 동호는 한강의 내륙 수운 터미널이 되고 노량진은 내륙 육로의 교통요지를 이루어 나루터가 되고 그리고 서강은 서해의 외해로 출입하는 항구 구실을 하고 있었다. 경강의 동호, 노량진, 서강의 구실이 모두 사라지고 서울 속의 한강은 상하수도의 수로 노릇일 따름이다. 한강 르네상스를 위해서는 오래된 미래가 마련되어야 하고 국토의 공간만 아니라 국토의 시간을 함께 가꾸어야 한다.

 

한강의 문화역사지리학..., 백제의 왕성도 있고 고구려의 산성도 있고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도 있다.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의 시를 비롯하여 조선 성리학자들의 온갖 사연들을 담은 시서화를 통해 문서상으로나마 특히 두모포 경관을 재구성해 볼 수 있다.

 

 

덕소, 팔당

 

경강의 중상류 지역이 이미 난개발의 양상을 드러낸다. 광나루(광진), 덕소, 팔당 일대로 뻗는 도심 외곽 교통의 혼란 상황이 가중되는데 경춘고속도로와 경춘 복선 전철 건설은 영동지방의 교통에 도움이 될지언정 서울 외곽의 혼잡에 대한 해소책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다산 정약용 생가 일대(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를 한강 수운 경관의 첫 꼭짓점으로 찍어볼 수 있는데 실학 관련 자료들을 소장하고 전시 연구하는 '실학박물관'도 생겨났다. 다산 생가 덕분에 강변 풍경이 간신히 흐트러지지 않았으나 홍대용과 박지원의 스승 격이던 김원행의 '석실서원'은 제대로 보존되지 못한다.

 

다산 생가를 통해 '성호 좌파'라 부르는 남인 계통 학맥과 더불어 노론 계열의 이용후생 학풍의 배양지를 살펴야 하고 아울러 후대의 척사위정 의병활동 루트를 더듬어볼 수 있어야 한다.

 

 

양수리 두물머리

 

서울 시내를 빠져나와 한강을 끼고 거슬러 오르면 곧바로 양수리 유원지에 닿을 수 있다. 춘천을 경유하여 북방에서 내려오는 북한강과 여주를 경과하여 남방에서 올라오는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 일대는 두 강줄기 이용자 모두에게 수운 교통의 요충지가 되어 큰 포구를 이루고 있었는데 남양주시 쪽도 양평군 쪽도 옛 강항의 자취는 남아있지 않다. 그렇지만 육로 교통으로는 여전히 서울 근교의 요지가 되고 있어서 관광 명소를 내세우는 위락시설들과 함께 별장지대가 되고 있다.

 

왕조시대에 한강은 이미 양평 포구에서 경강 역할을 떠맡고 있었다. 남한강 수운을 자주 이용했던 퇴계 이황의 경우 상경할 적에는 이곳에서 미리 관보를 읽어 서울 소식에 접할 수 있었고 하향할 적에는 관선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나랏배는 양평에서 회황을 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민간의 너벅선으로 갈아타곤 했다. 다산 정약용은 운길사 중턱에 자리한 수종사를 자주 찾고 기행시편도 다수 남겼는데, 이 사원에서 녹차를 마시며 옛 글들을 통해 두물머리 물굽이가 우리 역사를 어떻게 할러 오늘에 이르고 있는지 고증하면서 감회에 젖어 조망해볼 수도 있다. 양수리 유원지는 앞으로 문화역사경관 되살리기에도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이포나루, 파사산성

 

이포나루(여주근 금사면 이포리)는 북한강과 작별한 남한강 수로가 본격적으로 곡창 평야지대의 젖줄이 되어주고 있음을 보여주기 시작하는 유서 깊은 포구이다. 인근의 파사산성은 남한강의 물목과 길목을 차지하는 자가 한국사의 주인공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고대사의 군사요충지로 여주에서 이포를 거쳐 양평으로 우불구불 흐르는 남한강 전망대의 구실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이포나루 일대는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의 여러 유명 선비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인데 이러한 <유교산수>는 개발근대화 과정에서 <산업산수>에게 밀려나고, 썰렁한 콘크리트 정자 하나가 재건축되어 있을 따름이다. 이포나루에서 보 설치 공사가 한창 진행되는 중인데 과연 남한강 살리기인지 아니면 생태계 환란이 될 것인지 강물은 말이 없다.

 

 

신륵사 강월헌

 

여주 일대의 남한강은 옛 시절 제방을 쌓아볼 수 없는 환경이어서 선인들은 홍수 범람 방지를 위한 치산치수 사업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여주의 '여'라는 글자는 검은 말을 가르키는데 그 전에는 황려라는 명칭이었다. 홍수와 태풍을 일으키게 하는 황마와 흑마의 두 말에 관련된 홍수 전설에서 이런 지명이 생겨났는데 조포나루의 영원루(현재는 영월루)에 <전설 따라 삼천리>의 사연이 있다. 황마와 여마의 두 말이 물속으로부터 솟구쳐 올라 엄청난 홍수가 일어났다 하였다. 인당대사라는 이가 고삐를 던져 두 말에 재갈을 물리니 그제야 물결이 잠잠해졌다 한다. '신마에게 재갈을 물리게 한 절'이라는 뜻에서 신륵사라는 사명이 유래되었다. 그리고 신륵사 경내에는 석종과 백탑이 있는데 나옹선사와 목은 이색의 색다른 연분을 간직하고 있다. 여기에 강월헌은 봉황의 꼬리에 해당되는 부분에 세운 정자라 하는데 맞은편 조포나루 쪽의 영월루와 함께 여강 전망대의 역할도 한다.

 

 

 

조포나루는 고려 시대 이후 남판강 5대 강항의 하나로서 세곡운반과 물자수송의 물류 중심지를 이루고 있었다. 명종의 어머니 문정황후라던가 한말의 민비 등은 여주 일대의 대농장을 운영하여 서울 경제권의 배후 실력자가 될 수 있었다. 1963년 10월 23일 남한강의 대홍수 범람으로 조포나루 참사가 일어난 후에 여주대교가 건설되었다. 대교 아래 쪽에는 영월루가 있고 '영월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원래 여주 관아의 정문이던 <가좌 제1루>를 1925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시키면서 누각의 명칭도 바꾼 것이었다. 

 

 

탄금대

 

단양 제천 쪽에서 흘러오는 남한강 본류와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괴산을 거쳐 오는 달래강(달천)의 합수머리 일대는 삼국시대에 이미 대단한 군사 요충지였고 동시에 넓은 강폭의 호반을 형성하고 있어 물산집산의 중심지이자 승경지를 이루고 있었다. 이 합수머리 위쪽에 신라 진흥왕 시절에 세운 탄금대가 놓여있고, 그 아래쪽으로 강의 맞은편 일대는 그보다 앞서 고구려 장수왕 시대에 구축한 요새지 국원성 옛터가 된다.

 

고구려의 남진 정책으로 남한강 유역을 모두 빼앗긴 신라와 백제는 나제동맹으로 고구려군을 퇴치하게 되는데 AD 560년대에 이르러 신라는 충주 남한강 일대를 장악하게 된다. 탄금대는 여기에 가야 출신 우륵의 가야금 사연마저 얹어놓고 있으니 '전쟁과 사랑'의 고대 버전을 간직한다. 탄금대공원에는 임진왜란 시대의 신립 장군 전적비 등의 유적도 있다.

 

 

 

 

탄금호 중앙탑 (충주 가금면 탑평리)

 

 

 

조선시대에는 영남대로의 주요 길목으로 금천나루와 금천창이 있던 곳이었지만 시대를 거슬러 오르면 고구려가 남방경략으로 국원성을 설치하고 신라가 후일 탈환하여 중원경을 차리고 중앙탑을 세웠던 '역사의 고향'이었다. 이곳의 '탄금호 중앙탑공원'이라는 명칭보다는 '국원나루'라 부르는 것이 합당할 것이라 판단되기도 한다. 탄금호는 상류 쪽의 충주댐과 하류 쪽의 조정지댐으로 형성된 새로운 환경의 호반이 되고 있는데 조정 경기장으로 조성되어 세계대회를 유치해놓고 있기도 하다. 

 

 

 

 

옥순봉, 구담봉, 장회나루

 

서기 551년부터 신라의 17세 소년왕 진흥왕이 소백산을 넘어 남한강 일대를 장악하기 시작하였을 때 '하림궁'을 짓고 우륵의 가야금을 들으며 남한강 대하 러브 로망을 펼쳤던 절경지이다. 구담봉과 옥순봉이 조그만 반도처럼 돌출되어 강물이 돌아나가는 경승지이자 군사요충지였다(단양군 단성면 장회리)

 

48세의 이황이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17세의 관기 두향과 장회나루 일대에서 플라토닉 러브를 나누었다는 현대소설들의 상상력이 참으로 터무니없이 통속적이기만 하다. 단원 김홍도의 '옥순봉'이 걸작인데 산길을 따라 두 봉우리에 올라갈 수 있는 등산로가 개설되었다. 장회나루에서 유람선을 타고 물길을 따라 옥순봉 바위 아래 쪽으로 일주를 해볼수도 있지만 옥순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일품이다. 남한강이 상류의 단양 적성산성 쪽에서 하류의 충주 탄금대 쪽으로 어떻게 곡류하고 있는지 전체 윤곽과 함께 맞은편으로 금수산 일대의 산악군과 하류 쪽으로 충주 계명산, 그리고 북서쪽으로 제비봉이 한 눈에 들어찬다.

 

 

 

 

영남대로 옛길 안내

 

백두대간은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면서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을 치켜세우다가 삼척 지경에서 방향을 크게 돌려 서남향의 내륙지역으로 가로지르기를 한다. 태백산, 소백산, 도락산, 황정산을 올려놓고 이어서 다시 크게 방향을 돌려 서북쪽으로 올라간다. 남류하던 남한강이 단양 지경에서부터 방향을 틀어 서쪽으로 흐르기 시작하는 수세와 백두대간의 산세가 맞물린다.

 

월악산, 주흘산, 조령산, 희양산, 백화산, 이만봉, 군자산, 속리산, 민주지산, 덕유산.... 국토의 허리띠를 바짝 조여 놓고 있는 백두대간은 여기에 남한강, 금강, 낙동강, 섬진강의 물줄기를 내려주면서 대협곡지대를 형성한다. 국토 중앙지대의 남북 왕래가 까다롭게 되고 동서 횡단이 원활하지 않게 되니 새들도 울고 넘고 사람들도 산굽이마다 눈물 흘리는 '산전수전'의 상황이 벌어진다.

 

 

영남대로 좌로, 중로, 우로

 

영남대로는 직진도로가 아니다. 남성성의 백두대간과 여성성의 남한강 및 낙동강, 금강이 오락가락, 갈팡질팡 뜨거운 애정행각을 벌이는 행로의 형국과 유사하다. 영남대로는 원래 세 개라 할 것이니 좌로의 죽령, 중로의 새재, 우로의 추풍령이다. 그 중에서도 1970년대에 '도로공원' '도로박물관'으로 새재의 녹색환경이 복원됨으로써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보행길의 새재길이 영남대로를 대표하는 옛길처럼 되었다.

 

 

월악산 송계계곡

 

'월악나루'라 부르는 남한강 강변에서 미륵사지가 있는 충주의 미륵리까지 월악산과 포암산을 끼어 협곡이 형성되어 있는데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일대의 이 골짜기를 송계계곡이라 부른다. 조령길(문경새재)은 조선 태종 때 관행도로로 놓은 것이고, 송계계곡을 거쳐 하늘재를 넘는 길이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 남북왕래의 요충지였다.

 

 

 

충주 미륵리 미륵사지, 하늘재 

 

 

미륵사지(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는 경주에서 하늘재 넘어 금강산으로 가던 마의태자와 덕주공주 남매가 신라부흥을 위한 아지트로 지은 절터라는 전설이 있으나 실은 왕건과 그의 사돈인 충주 호족 출신 유긍달 장군이 경주 석굴암을 모방하여 군사요충지에 호국사찰로 지은 것이 확실하다. 거대석불은 이제껏 말쑥하기만 한 얼굴인데, 이에 얽힌 사연들은 흥미로운 역사미스테리 추리를 가져보도록 해준다.

 

하늘재(문경시 문경읍 관음리)는 서기 156년에 신라가 닦은 '계립령' 옛길의 루트임이 확실한데, 월악산 국립공원에서 역사문화 생태로로 숲길을 조성해놓았다. 그러나 문경읍은 하늘재 고개마루까지 자동차 통행로를 개설해놓고 있는데 충주시 미륵리의 월악산 국립공원 지경으로 넘어오면서부터는 숲길이 마련되어 찻길을 차단시킨다. 하나의 고개임에도 남쪽에 '관음'과 북쪽에 '미륵'을 건사하는 이런 국토 아리랑 고개는 다른 어디에도 없다. 하늘재에서 포암산으로 오르는 들머리에는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추측되는 달마산성이 있으나 아무런 관심조차 없이 보존 상태가 열악하기만 하다.

 

 

 

▲ 하늘재의 <연아를 닮은 나무>

 

 

문경새대 제1관문 → 여궁폭포

 

'새재'는 조선 태종 때 새로 닦은 잿길의 관도였기 때문에 이런 지명을 얻었다 하기도 하고 억새풀이 많은 지역인 데에서 유래된다는 설, 새도 울고 넘어가는 고개라는 데에서 연유된다는 설도 있으나 실은 그 종합편이다.

 

국토 한복판에 녹색 도로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산악인들의 등산로로서도 제격이지만 문화역사지리 탐구 대상으로 삼는 이들이 더 많아야 할 것이다.

 

괴산군 연풍면 고사리의 제3관(조령관)~제2관(조곡관)~제1관(주흘관)이 복원되어 있고 최근에는 선비길, 과거길로 이 고개를 지나다녔던 시인묵객 선비들의 시비를 도처에 세워놓고 있으며 드라마 세트장으로 관광객이 몰리기도 한다.